매해 돌아오는 금융권 ‘슈퍼 주총’이 임박해지며 관전 포인트에 다시금 관심이 쏠린다. 금융권들은 차례대로 주주총회 소집공고를 내고 일자와 안건을 공시하는 분위기다. 는 금융권의 주총 개막을 자세히 살펴보며 4대 금융지주 중 신한금융지주와 KB금융지주 안건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정부는 방역 대책으로 내세운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에 힘쓰며 확산을 막고 있는 가운데, 이에 최대 피해는 소상공인이 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로나 직격탄을 맞은 소상공인들을 위해 많
MS 전 회장 빌 게이츠는 "하버드 대학 졸업장보다 독서하는 습관이 더 중요하다. 나의 성공 비결은 어릴 때부터 길러온 독서 습관이다"라고 했다. 21세기는 지식 정보화 사회이다. 지식과 정보력이 개인의 능력, 사회 경쟁력,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힘이라 볼 때, 자녀에게 독서를 통하여 삶의 원동력을
어느 날 대학교 1학년 딸을 둔 제자가 찾아왔다. 제자는 좋은 직장을 갖고 슬하에 딸 두 명을 둔 유복한 가정의 가장이다. 그러나 그는 매일 밤늦게 귀가하는 딸에 대한 고민으로 힘든 나날을 보낸다는 말을 했다. 매일 밤늦게 들어오는 딸의 행동을 말로 타일러 보고, 가끔은 큰 소리로 질책도 해봤지만
'행복'이란 단어는 듣기만 해도 사람들의 공감을 일으킨다. "당신은 왜 사십니까?"라고 질문을 한다면 결국 모든 대답의 끝은 행복이 되지 않을까 한다. 결혼하고자 하는 이유도 단순히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는데 목표가 있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하고 단란한 가족을 꿈꾸기 때문일 것
평소 방글라데시나 부탄 같은 가난한 나라가 행복 지수가 높다는 이유가 무척 궁금했었다. 몇 년 전 방글라데시 수도인 ‘다카’ 공항에 도착했을 때 할 일 없이 공항을 기웃거리는 수많은 인파, 우리나라 6.25 당시를 상기시키는 지붕 위에까지 사람이 가득 타고 달리는 기차, 다카 시내를 가득 메운 사
우리나라 대학에 본격적으로 빨간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급격한 학령인구 감소로 위기의식이 극에 달하고 있다. 교육부가 예상한 2019년 입학가능자원(2020학년도 입학)은 52만 6,267명이었다. 2020학년도 입학정원은 49만 655명 였으나, 2020학년도 입학가능자원이 35,612명 많았음에도 일반대 + 교육대 + 전문대
우리 나라의 입시 시장은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학종이건 정시이건 어떤 경우에도 소득 계층이 높은 가정 출신 학생이 더 유리하다. 졸업 후 좀 더 고소득 직업을 얻는 데 유리한 소위 명문대의 경우 상위 소득 계층 학생들이 서너 배 정도 더 많다. 저소득층일수록 기회는 점점 줄어든다는 얘기다. 2020년
예전 우리 아이들은 우주탐험을 꿈꾸었다. 태권V와 같은 하늘을 나는 로봇을 상상하였고 암이나 치매를 정복하는 꿈을 꿨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이공계 학생들은 의사를, 수학을 못해 인문계를 택한 학생들은 공무원 또는 공공기관 입사가 지상 최대 과제가 돼버렸다. 하지만 이 자리도 소수의 몫이
전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19로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을 위협 당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가? 평소 너무 익숙해서 좀 소홀했던 사람들에게 안부를 더 자주 묻게 되었다. 때로 형식적 이였던 “잘 지내지?” 라는 단어가 최근에는 좀 더 정성스러워졌다. 힘든 시기 어떻게 견디고 있
코로나19가 터지고 여기 저기서 '비대면', '언텍트', '포스트 코로나' 등의 단어 들이 일상적으로 쓰이며, 마치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것처럼 여기 저기서 날리다. 교육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과연 이번 코로나19때만 이럴까? 우리는 뭔가 새로운 기술이나 방법이 나오거나 큰 사건
코로나19 사태는 대학의 존재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지난 3월 개학 이후, 대학에서 대부분의 강의가 온라인으로만 이루어지면서 큰 혼란에 빠졌다. 지난 학기 학생들은 온라인 수업을 하니 학교 시설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이미 낸 등록금의 일부를 돌려달라는 등록금 반환
자녀와의 관계에서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관계의 질을 결정하는데 제법 큰 비중을 차지한다. 어떤 부모는 자녀와 깊은 공감을 나누며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지만 어떤 부모는 대화할 때마다 서로 상처를 남기며 관계가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우선 부모-자녀 간의 대화 패
한동안 풀리지 않던 문제를 통찰과 직관적 사고를 통하여 해결했을 때, 누구나 아하(Aha)를 외치게 된다. 아르키메데스는 금관의 순도를 알기 위해 애를 쓰다가 어느 날 목욕탕에서 목욕통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유레카(Eureka, 알았다)를 외쳤고, 천재 수학자 가우스는 1+2+……+100을 계산할 때 1+100, 2+99, …
부모란 말 그대로 아비와 어미를 가리킨다. 결혼하면 자연스럽게 부모가 되는 것으로 알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부부와 부모는 엄연히 다르다. 부부의 정체성과 부모의 정체성은 한 지붕 아래 같이 산다는 것 빼고는 비슷한 구석이 별로 없다. 우선 부부는 관계의 대상이 배우자이지만 부모는 그 대상이
공감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이번 칼럼에서는 한 에피소드를 통해 공감에 대한 작은 통찰을 나누어 보려고 한다. 얼마 전에 친구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넘어졌는데 인대가 파열해 수술해야 한다고 한다. 가족이 병간호를 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다음날 수술 일정을 앞두고
우리 사회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 아이의 명문대 진학을 위해 사교육을 시키고 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아이가 없다는 뉴스는 이제 당연시 여겨져 기삿거리도 되지 않는다.이것은 아마도 우리 사회가 '승자독식 사회', '소득 양극화 사회'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불평등데이터베이스(WID)에 따르면 우
보통 자녀들은 아빠보다는 엄마를 더 좋아한다. 힘 있는 아빠보다 연약한 엄마에게 더 안기기를 원하고, 놀아달라고 요구한다. 어쩌면 아빠도 자녀들이 엄마와 지내기를 바라고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녀에게는 아빠가 분명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삶에서 끊임없이 물어지는 질문이 있다. 나 자신, 바로 ‘존재(Being)’에 대한 질문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이런저런 존재방식으로 쉼 없이 고민하게 되고, 원하든 원치 않든 나와 타인 앞에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야 하는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진짜 얼굴은 그리 호락
창의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율적인 학습 분위기가 필수적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자율은 도리어 창의성에 역기능으로 작용한다. 인간은 자율을 통하여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지만 무조건적인 자율이나 책임이 따르지 않는 자율은 방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서 자녀의 창의성 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