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이코노미=손경숙 기자]=루이비통, 크리스찬 디오르 등을 보유한 글로벌 최대 명품그룹 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은 2012년 말 프랑스 언론과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연 소득 100만 유로 이상 고소득자에게 소득의 최대 75%를 세금으로 내게 하는 올랑드의 부자증세 정책 신설을 앞두고 벨기에 국적 취득을 신청했기 때문이었다. 유명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 알랭 들롱 등도 벨기에·스위스로 이주하는 걸 계획했다. 부자세 정책 자체에 대한 찬반 논쟁이 뜨거웠지만 해외로 도피하려는 부자들이 국가 위기를 외면한 배신자라는 비난에는 대다수 국민이 한목소리를 냈다고 중앙선데이가 9일 보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당시 포브스가 발표한 세계 부자 서열 4위이자 프랑스에서는 최고 부자였던 아르노 회장에게 공격이 집중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진보 성향의 대표 일간지 리베라시옹(Libération)은 표지에 '꺼져, 이 부자 머저리야!(Casse-toi riche con!)'라는 과격한 표현과 함께 급하게 싼 듯한 여행가방을 들고 서 있는 아르노의 사진을 게시했다. 극우계열 정치가 마린 르펜도 아르노의 국적 포기를 '추한 행동'이라고 비난했고, 사업가들마저 '프랑스가 덕 본 것도 있지만, 그 또한 프랑스에 진 빚이 많은 사람'이라며 아르노를 조국의 배신자로 치부해 버렸다. 올해 초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보복 테러를 당했던 프랑스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는 '명품 창녀에게 75% 세율 부과를 찬성한다'는 만평을 내놓았다. 루이비통 핸드백, 부츠로 치장한 아르노가 욕심에 찬 얼굴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성난 소비자들 '땅콩 회항' 때처럼 분노

벨기에도 아르노 회장의 이주를 그다지 반기지 않는 듯했다. 거주 기간이 모자란다, 우리 문화에 대한 존경 없이는 국적을 취득할 수 없다는 이유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급기야 벨기에 LVMH의 세무 자료를 프랑스 정부에 공개할 의향을 내비치기도 했다. '냉혹한 사업가'로 알려졌던 아르노 회장은 자신의 문제가 기업 경영과 브랜드 명성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자 '이기적인 배신자'라는 오명만 더한 채 벨기에 국적 취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규모 리콜로 위기에 처한 도요타자동차의 도요다 아키오 사장은 2012년 말 열린 도쿄 모터쇼에 분홍색 세단을 소개하면서 '재탄생(Reborn)' 의지를 천명했다. [중앙포토]
경영자의 일거수일투족은 기업 이미지에 그대로 투영된다. 횡령·배임과 같이 불법 사건에 휩쓸리지 않더라도 상식을 넘어선 경영자의 태도와 행동은 개인의 불명예에 그치지 않고 오랜 기간 쌓아온 기업 신뢰와 명성에 흠집을 낸다. 그나마 LVMH는 한정된 시장을 상대하는 명품 기업인 데다 경영자나 정치인의 개인사와 조직 문제를 구분하는 서구 문화의 특성 덕분에 아르노의 스캔들로 기업 브랜드 가치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 불행은 피할 수 있었다.

롯데의 경영권 분쟁은 경영자 개인을 넘어 기업 차원의 정체성 의혹을 낳았다. 껌·아이스크림·과자부터 쇼핑·금융·오락·아파트까지 대중의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은 브랜드인지라 시장의 반응은 더 민감하다. 어린 시절부터 가깝게 지낸 친구의 복잡하고 미심쩍은 과거가 드러나고 국적마저 불분명해지니 놀라고 당혹스러워하는 사람이 많다. 평소 애용하고 호감을 가졌던 고객이라면 더 큰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특히 한국은 상대나 상황을 판단할 때 배경과 맥락을 중시하는 고배경(high context) 문화의 뿌리가 깊다. 출신과 소속을 중시하고 구분 짓기에 익숙한 환경에서 경영자 위기(CEO risk)와 정체성 위기(identity risk)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데다 '일본 기업'이라는 의심이 소비자의 반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경영권 다툼을 목격한 소비자들은 '한심하다'부터 '역겹다'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서슴지 않는다. 여느 때의 대기업을 향한 분노와는 다르다. 제품, 서비스의 품질이나 기업 행동이 약속과 다르거나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했을 때, 자존감이 상처받았을 때 소비자들은 화를 낸다. '갑을 논란'이나 '땅콩 회항' 사건 때 그랬듯이 반드시 자신이 직접 당하지 않더라도 약자의 입장이 돼 함께 분노하고 공격한다.

지금의 위기는 기업 경쟁력 돌아볼 기회

그런데 경영자들의 싸움판에는 소비자들이 공감할 약자도, 개입할 여지도 없다. 상황을 개선할 욕구도 권한도 없으니 거리를 두고 지켜보지만 실망감만 커질 뿐이다. 최근 잦아진 한국 기업의 경영권 갈등은 소비자들의 피로와 절망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고객 우선과 정도경영을 외치던 신한은행은 경영자 간 내분 사태로 공들여 쌓은 신뢰 이미지를 한순간에 잃어버렸다.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출판하며 한국의 독서문화를 주도해온 김영사도 최근 전·현직 대표의 폭로전으로 실망감을 안겨줬다. 가족 간에도 치밀한 비방전을 벌이는 롯데 사태를 접하면서 고객 존중과 진정성 있는 행동을 기대하기가 어려워졌다.

총체적 위기에 빠진 롯데에는 거듭남(rebirth)·리브랜딩(re-branding)만이 길이다. 훼손된 이미지를 복구하는 차원이 아니라 새로운 브랜드를 탄생시키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런 각오를 소비자들에게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다. 2009년 대규모 리콜 사태로 사상 최대의 위기에 처했던 도요타는 수년간 수차례에 걸친 캠페인·TV 광고를 통해 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안전과 품질을 중시하는 경영정신을 고객들에게 꾸준히 확인시켰다. 아키오 회장은 도쿄 모터쇼에서 파격적인 분홍색 크라운 세단을 소개하며 도요타의 재탄생 의지를 천명하기도 했다.

반감을 품은 소비자가 기업을 떠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만한 제품 가치와 서비스 정신, 책임감을 지닌 대안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떠난 고객이 다시 돌아오게 하는 회복력도 차별화된 브랜드 가치에서 비롯된다. 이번 위기는 기업의 경쟁력을 제대로 점검하고 분석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제품, 브랜드의 고유성, 혁신성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자기비판도 반드시 치러야 할 과제다.

최순화 소비자학을 공부했다.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에서 석사 학위를, 퍼듀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근무했다. 현재 국내외 소비시장 트렌드 분석과 브랜드 관리 전략 등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반감고객들』(2014), 『I Love 브랜드』(공저, 2010)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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